2007년 여름을 강타했던 뮤지컬 <쓰릴미>를 보면서 마지막까지 내 머릿속을 맴돌았던 말들은 "순수한 악함"이었다. 리차드와 네이슨 그들은 단순한 범죄자가 아니라 순.수.하.게 범죄를 저지르고 순.수.하.게 악했으니까...순수한 악함...그 말들을 곱씹으면서 과연 '순수'라는 어휘가 이 상황에 적절한가에 대하여 고민하게 되었다.
순수가 가진 긍정적 가치를 역설적으로 비틀어 사용한 표현이라기에는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순수' 그 자체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과연 '순수'라는 어휘가 가진 긍정적 가치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동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순수'가 주는 긍정적인 느낌과 그 가치는 과연 동일한가? 그러고 보면 '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과연 언어에 긍정, 부정이 있을 수 있을까?
비단 이 경우뿐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혹은 말을 하는 행위를 통해서 쉽게 언어를 한정한다. 하나의 어휘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버리고는 모든 상황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요즘 계속 곱씹는 말 중의 하나가 '평등'이다. 과연 '평등'은 어떤 가치를 가진 말일까?
처음 이 말을 만날 때 '평등'이라는 말 주변에 붙어 계속 연관되어 인식되는 몇몇 상황들 덕분에 이 말은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말로 각인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어떠하던간에 링컨의 노예 해방을 비롯한 개개의 사건들은 '평등'이란 말이 지닌 절대적 가치를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평등'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긍정적인 절대 가치를 지닌 말인가에 대하여 점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교육을 받고, 교육과정에 의거한 학교 교육을 받을 권리는 '평등'하게 적용되지만, 그 교육과정의 끝에 치뤄지는 입시를 통해서 대학을 가는 데에까지 '평등'을 적용할 수는 없다. 누구나 대학을 가고 싶어하지만, 그것도 서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지만 이는 평등하게 주어진 기회를 개개인이 어떻게 누렸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빈부의 격차에 의해서 서로 다른 기회를 가진 것이라 주장할 수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이 평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결과물에 수긍하느냐고 물을수도 있지만, '평등'한 기회는 최소한의 권리를 통해 구현되야지 모든 결과물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좀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더 좋은 시험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먹고, 입고, 주거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지만 그 '평등'한 권리가 밥상의 메뉴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좀더 넓은 집에 살 수 있지만 소유하거나 사는 집의 평형까지 '평등'의 권리가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권리를 구현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사회보장제도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는 기.본.적.인 권리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욕구를 오롯이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매우 긍정적인 말인 '평등'이 구현되고 영향을 미치는 권역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결과물에까지 그 잣대를 들이밀면서 개개인을 편가르는 행위는 언어의 뉘앙스가 가진 함정에 빠진 오류가 아닐까? 언어는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본질을 드러내 소통하게 만드는 도구이지, 본질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결국 본질에 비하여 언어는 작을 수밖에 없고, 한정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의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다 보면 언어가 가진 객관적 의미를 벗어난 문맥의 의미를 확대하여 그 가치에 무한한 면죄부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순수03 (純粹) 「명」「1」전혀 다른 것이 섞이지 아니함. ¶순수 성분/순수 결정체/순수 농축액/미다스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이 황금으로 변하듯 인간의 손에 닿는 모든 것은 그 순수가 파괴되기 마련이다.≪홍성암, 큰물로 가는 큰 고기≫§ 「2」사사로운 욕심이나 못된 생각이 없음. ¶그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를 지녔다. §
순수가 가진 긍정적 가치를 역설적으로 비틀어 사용한 표현이라기에는 나에게 그들의 모습은 '순수' 그 자체로 각인되었기 때문에 과연 '순수'라는 어휘가 가진 긍정적 가치가 어떤 상황에서든지 동일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 해보게 되었다. '순수'가 주는 긍정적인 느낌과 그 가치는 과연 동일한가? 그러고 보면 '역설'이라는 말 자체가 모순일 수 있다. 과연 언어에 긍정, 부정이 있을 수 있을까?
비단 이 경우뿐만이 아니다.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혹은 말을 하는 행위를 통해서 쉽게 언어를 한정한다. 하나의 어휘에 대하여 특별한 가치를 부여해 버리고는 모든 상황에 동일한 가치를 부여하려고 한다. 요즘 계속 곱씹는 말 중의 하나가 '평등'이다. 과연 '평등'은 어떤 가치를 가진 말일까?
평등 (平等) 「명」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 ¶교육 기회의 평등/평등이 보장되는 사회/그는 자유와 평등은 만민이 누려야 할 권리라고 외쳤다. §
처음 이 말을 만날 때 '평등'이라는 말 주변에 붙어 계속 연관되어 인식되는 몇몇 상황들 덕분에 이 말은 매우 긍정적인 가치를 지닌 말로 각인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 어떠하던간에 링컨의 노예 해방을 비롯한 개개의 사건들은 '평등'이란 말이 지닌 절대적 가치를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평등'이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긍정적인 절대 가치를 지닌 말인가에 대하여 점점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다.
누구나 교육을 받고, 교육과정에 의거한 학교 교육을 받을 권리는 '평등'하게 적용되지만, 그 교육과정의 끝에 치뤄지는 입시를 통해서 대학을 가는 데에까지 '평등'을 적용할 수는 없다. 누구나 대학을 가고 싶어하지만, 그것도 서로 좋은 대학에 가고 싶어하지만 이는 평등하게 주어진 기회를 개개인이 어떻게 누렸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혹자는 빈부의 격차에 의해서 서로 다른 기회를 가진 것이라 주장할 수도, 개개인에게 주어진 능력이 평등하지 않은데 어떻게 결과물에 수긍하느냐고 물을수도 있지만, '평등'한 기회는 최소한의 권리를 통해 구현되야지 모든 결과물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적어도 좀더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더 좋은 시험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당연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먹고, 입고, 주거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가지지만 그 '평등'한 권리가 밥상의 메뉴까지 간섭할 수는 없는 것이다. 누군가는 좀더 넓은 집에 살 수 있지만 소유하거나 사는 집의 평형까지 '평등'의 권리가 간섭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인 권리를 구현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사회는 사회보장제도라는 이름으로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이는 기.본.적.인 권리에 국한되어야 하는 것이지, 인간의 욕구를 오롯이 충족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매우 긍정적인 말인 '평등'이 구현되고 영향을 미치는 권역은 제한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결과물에까지 그 잣대를 들이밀면서 개개인을 편가르는 행위는 언어의 뉘앙스가 가진 함정에 빠진 오류가 아닐까? 언어는 본질 그 자체는 아니다. 본질을 드러내 소통하게 만드는 도구이지, 본질 그 자체일 수는 없다. 결국 본질에 비하여 언어는 작을 수밖에 없고, 한정된 인간의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무한의 무언가를 표현하려고 하다 보면 언어가 가진 객관적 의미를 벗어난 문맥의 의미를 확대하여 그 가치에 무한한 면죄부를 허용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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